채식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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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2016년 맨부커상(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 수상작. 10년 전 작가 한강은 ‘내 여자의 열매’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식물이 되고, 함께 살던 남자는 그녀를 화분에 심는 이야기였다. <채식주의자>는 언젠가 그 변주를 쓰고 싶다는 바람에서 출발했다. 상처받은 영혼의 고통과 식물적인 상상력이 결합해 섬뜩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연작 소설이다.

표제작인 ‘채식주의자’, 200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몽고반점’, 그리고 ‘나무 불꽃’, 2002년 겨울부터 2005년 여름 사이에 씌어진 세 편의 중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세 이야기의 한 사람의 주인공을 공유한다. 죽어가는 개에 대한 어린시절의 기억으로 점점 육식을 멀리하고 스스로가 나무가 되어간다고 생각하는 ‘영혜’.

그러나 작중 화자는 서로 다르다. ‘채식주의자’에서는 아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이, ‘몽고반점’에서는 처제의 엉덩이에 남은 몽고반점을 탐하며 예술혼을 불태우는 사진작가인 영혜의 형부가, ‘나무 불꽃’에서는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을 목격했으나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혜가 각각 화자로 등장한다.

단아하고 시심 어린 문체와 밀도있는 구성력이라는 작가 특유의 개성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살아있다. 이전까지 소설가 한강이 발표해온 작품에 등장했던 욕망, 식물성, 죽음, 존재론 등의 문제를 한데 집약시켜놓은 완결편이라 할 수 있다.


전자책으로 미리 읽기


한강 연작소설
채식주의자


종이책 초판 1쇄 발행 2007년 10월 30일
종이책 초판 67쇄 발행 2018년 4월 18일
전자책 초판 발행 2014년 7월 31일
전자책 수정 발행 2018년 7월 24일

지은이 | 한강
펴낸이 | 강일우
책임편집 | 황혜숙
펴낸곳 | (주)창비
등록 | 1986년 8월 5일 제85호
주소 | 413-120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184
전화 | 031-955-3333
팩스밀리 | 031-955-3399 · 편집 031-955-3400
홈페이지 | www.changbi.com
전자우편 | lit@changbi.com
트위터 | @changbi_books
페이스북 | www.fb.com/changbi
전자책 공급 | 한국출판콘텐츠
전자책 제작 | 이타래

ⓒ 한강 2007
종이책 ISBN 978-89-364-3359-8 (03810)
전자책 ISBN 978-89-364-0390-4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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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자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4 우수콘텐츠 전자책 제작 지원’ 선정작입니다.


ⓒ 이영균

한 강 韓 江

1970년 늦은 11월에 태어났다.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1993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등이 있다.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리문학상, 이상문학상, 오늘의 젊은예술가상,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채식주의자』는 “탄탄하고 정교하며 충격적인 작품으로, 독자들의 마음에 그리고 그들의 꿈에 오래도록 머물 것이다”라는 평을 받으며 한국인 최초로 2016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했다.

표지그림

에곤 실레(Egon Schiele), 「네 그루의 나무」(Four Trees, 1917)


차 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해설·허윤진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끌리지도 않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단발머리, 각질이 일어난 노르스름한 피부, 외꺼풀 눈에 약간 튀어나온 광대뼈, 개성있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한 무채색의 옷차림. 가장 단순한 디자인의 검은 구두를 신고 그녀는 내가 기다리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힘있지도, 가냘프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내가 그녀와 결혼한 것은, 그녀에게 특별한 매력이 없는 것과 같이 특별한 단점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신선함이나 재치, 세련된 면을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무난한 성격이 나에게는 편안했다. 굳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박식한 척할 필요가 없었고, 약속시간에 늦을까봐 허둥대지 않아도 되었으며, 패션 카탈로그에 나오는 남자들과 스스로를 비교해 위축될 까닭도 없었다. 이십대 중반부터 나오기 시작한 아랫배, 노력해도 근육이 붙지 않는 가느다란 다리와 팔뚝, 남모를 열등감의 원인이었던 작은 성기까지, 그녀에게는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았다.

언제나 나는 과분한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어린시절에는 나보다 두세살 어린 조무래기들을 거느리고 다니며 골목대장 노릇을 했고, 자라서는 넉넉히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학에 지원했으며, 내 대단찮은 능력을 귀하게 여겨주는 작은 회사에서 내세울 것 없는 월급이나마 꼬박꼬박 받을 수 있다는 데 만족했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로 보이는 그녀와 결혼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예쁘다거나, 총명하다거나, 눈에 띄게 요염하다거나, 부유한 집안의 따님이라거나 하는 여자들은 애초부터 나에게 불편한 존재일 뿐이었다.

내 기대에 걸맞게 그녀는 평범한 아내의 역할을 무리없이 해냈다. 아침마다 여섯시에 일어나 밥과 국, 생선 한토막을 준비해 차려주었고, 처녀시절부터 해온 아르바이트로 적으나마 가계에 보탬도 주었다. 일년간 다닌 적이 있다는 컴퓨터그래픽 학원의 보조강사로 일했고, 출판만화의 말풍선에 대사를 쳐넣는 하청일을 받아 집에서 작업했다.

아내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나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일은 드물었고, 내 귀가시간이 아무리 늦어도 관여하지 않았다. 어쩌다 함께 있는 휴일에 어딘가로 외출하기를 청하지도 않았다. 내가 오후 내내 텔레비전 리모컨을 쥐고 뒹구는 동안 아내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아마도 일을 하거나 책을 읽는 모양으로–––아내의 취미라 할 만한 것은 기껏 책 읽기 정도였는데, 그 책들이란 대부분 표지를 열어보기도 싫을 만큼 따분해 보이는 것들이었다–––끼니때에만 문을 열고 나와 말없이 음식을 만들었다. 사실, 그런 아내와 산다는 게 그다지 재미있는 일일 리는 없었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번씩 직장동료나 친구 들의 휴대폰을 울려대는 아내들, 주기적으로 바가지를 긁어 요란한 부부싸움을 벌이곤 한다는 아내들이 피곤하게 느껴지던 터였으므로 나는 감사히 여겼다.

오직 한가지 아내에게 남다르다고 할 만한 점이 있다면 브래지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짧고 민숭민숭했던 연애시절, 우연히 그녀의 등에 손을 얹었다가 스웨터 아래로 브래지어 끈이 만져지지 않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조금 흥분했었다. 혹 그녀가 나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인지 판단하기 위해 잠시 새로운 눈으로 그녀의 태도를 관찰했다. 관찰의 결과는, 그녀가 신호 따위를 전혀 보내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신호가 아니라면, 게으름이나 무신경인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볼품없는 그녀의 가슴에 노브라란 사실 어울리지도 않았다. 차라리 두툼한 패드를 넣은 브래지어를 하고 다녔다면 친구들에게 보일 때 내 체면이 섰을 것이다.

결혼한 뒤 아내는 집에서 아예 브래지어를 벗고 지냈다. 여름철에 잠깐 외출할 때면 동그랗게 돌출된 젖꼭지의 윤곽이 드러날까봐 할 수 없이 브래지어를 했지만, 일분 안에 호크를 풀어버렸다. 옅은 색의 얇은 상의나 약간 끼는 옷을 입었을 경우에는 풀린 호크가 역력히 드러나는데도 그녀는 괘념하지 않았다. 내가 나무라자, 그녀는 찌는 듯한 더위에 조끼를 겹쳐 입는 것으로 브래지어를 대신했다. 답답해서, 브래지어가 가슴을 조여서 견딜 수 없다고 아내는 변명했다. 나야 브래지어를 해본 적이 없으니 그것의 착용감이 얼마나 숨막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여자들이 그녀만큼 브래지어를 싫어하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으므로, 그녀의 과민함은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외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올해로 결혼 오년차에 접어들었으나, 애초에 열렬히 사랑하지 않았으니 특별히 권태로울 것도 없었다. 지난해 가을 이 집을 분양받기까지 임신을 미뤄왔으니, 슬슬 아빠 소리를 들을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지난 이월 어느 새벽 아내가 잠옷바람으로 부엌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나는 우리의 생활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으리라고 상상한 적이 없었다.

*

“뭐 하고 서 있는 거야?”

나는 욕실의 불을 켜려다 말고 물었다. 새벽 네시쯤 되었나. 회식에서 마신 소주 병 반 덕분에 요의와 갈증을 함께 느끼고 깨어난 참이었다.

“응? 뭐 하고 있느냐구?”

나는 오싹한 추위를 느끼며 아내가 있는 쪽을 보았다. 잠과 취기가 가셨다. 아내는 꼼짝 않고 서서 냉장고를 마주보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옆얼굴의 표정을 식별할 수 없었으나, 무엇인가가 섬뜩했다. 그녀의 숱 많은, 염색하지 않은 검은 머리는 부스스하게 부풀어 있었다. 발목까지 오는 흰 잠옷치마는 언제나처럼 끝부분이 약간 위로 말려 있었다.

안방과 달리 부엌은 꽤 쌀쌀했다. 평소라면, 추위를 타는 아내는 서둘러 카디건을 걸쳐입고 털슬리퍼를 찾아신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 그렇게 서 있었던 것인지, 그녀는 맨발로, 봄가을까지 입는 얇은 잠옷차림으로,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듯 우뚝 서 있었다. 마치 냉장고가 있는 자리에 내 눈에 안 보이는 사람이–––혹은 귀신이라도–––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뭔가. 말로만 듣던 몽유병인가.

나는 석상처럼 굳어 있는 아내의 옆모습을 향해 다가갔다.

“왜 그래? 뭐야 지금……”

내가 아내의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 뜻밖에도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내가 안방에서 나오는 것, 질문,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까지 모두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다만 무시했을 뿐이다. 가끔 그녀가 심야드라마에 열중해 있을 때, 내가 귀가하는 기척을 듣고 있으면서 무시했던 것과 같이. 그러나 새벽 네시의 캄캄한 부엌, 사백 리터 냉장고의 희끄무레한 문 앞에서 몰입할 만한 무엇이 있다는 것인가?

“여보!”

나는 어둠속에 드러난 그녀의 옆얼굴을 보았다. 처음 보는, 냉정하게 번쩍이는 눈으로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꿈을 꿨어.”

그녀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이 몇시야, 대체.”

그녀는 나에게서 몸을 돌려, 문이 열려 있는 안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문턱을 넘자 팔을 뒤로 뻗어 조용히 문을 닫았다. 나는 혼자 어두운 부엌에 남아 그녀의 흰 뒷모습을 삼킨 방문을 바라보았다.

나는 욕실의 불을 켜고 들어갔다. 며칠째 영하 십도 안팎의 추위가 계속되던 즈음이었다. 몇시간 전에 내가 샤워를 했으므로, 그때 물이 튄 슬리퍼가 아직 차갑게 젖어 있었다. 욕조 위로 시커멓게 뚫린 환풍구에서, 바닥과 벽의 흰 타일들에서 냉혹한 계절의 적막감이 느껴졌다.

안방으로 돌아갔을 때, 아내가 웅크리고 누워 있는 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나 혼자 있는 방 같았다. 물론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매우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든 사람의 숨소리 같지는 않았다. 손을 뻗으면 그녀의 따스한 살을 만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나는 그녀를 만질 수 없었다. 그녀에게 말을 붙이고 싶지도 않았다.

*

이불 속에 누운 채 나는 잠시 현실감을 잃고, 흰색 커튼을 투과해 방 안 가득 쏟아져들어온 겨울아침의 햇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반쯤 머리를 들어 벽시계를 본 순간 튀어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갔다. 부엌의 냉장고 앞에 아내가 있었다.

“미쳤어? 왜 안 깨웠어? 지금이 몇신데……”

발에 물컹한 것이 밟혀 나는 말을 멈췄다.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아내는 어젯밤과 똑같은 잠옷차림으로, 부스스 헝클어진 머리를 늘어뜨린 채 쪼그려앉아 있었다.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희고 검은 비닐봉지들과 플라스틱 밀폐용기들이 발디딜 데 없이 부엌바닥에 널려 있었다. 샤브샤브용 쇠고기와 돼지고기 삼겹살, 커다란 우족 두 짝, 위생팩에 담긴 오징어들, 시골의 장모가 얼마 전에 보낸 잘 손질된 장어, 노란 노끈에 엮인 굴비들, 포장을 뜯지 않은 냉동만두와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꾸러미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내는 커다란 쓰레기봉투에 그것들을 하나씩 주워담는 중이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나는 마침내 이성을 잃고 고함을 질렀다. 어젯밤과 똑같이 나의 존재를 무시하며 그녀는 계속해서 고기 꾸러미들을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쇠고기와 돼지고기, 토막난 닭, 적게 잡아도 이십만원어치는 될 바다장어를.

“당신 제정신이야? 이걸 왜 다 버리는 거야?”

나는 비닐봉지를 헤치고 달려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뜻밖에 아내의 손목 힘은 완강해, 내 얼굴이 더워지도록 힘을 주고서야 비닐봉지를 놓게 할 수 있었다. 발개진 오른 손목을 왼손으로 주무르며, 아내는 평상시와 똑같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꿈을 꿨어.”

다시 그 얘기였다.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아내는 나를 마주보았다. 그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제기랄!”

나는 간밤 거실의 소파에 던져둔 외투를 뒤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뒤진 안주머니에서 자지러지는 휴대폰이 손아귀에 잡혔다.

“죄송합니다.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서…… 정말 죄송합니다. 최대한 서둘러 도착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곧 갈 수 있습니다. 조금만…… 아닙니다, 그러시면 안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나는 휴대폰 폴더를 닫고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급하게 면도하느라 두 군데 상처가 났다.

“와이셔츠 다려놓은 거 없어?”

대답이 없었다. 나는 욕설을 퍼부으며 욕실 앞의 빨래통을 뒤져 어제 던져놓은 셔츠를 찾았다. 다행히 구김이 많지 않았다. 넥타이를 머플러처럼 걸치고, 양말을 신고, 수첩과 지갑을 챙기는 동안에도 아내는 부엌에서 나와보지 않았다. 결혼 오년 만에 나는 처음으로 아내의 뒷바라지와 배웅 없이 출근해야 하는 것이었다.

“미쳤군. 완전히 맛이 갔어.”

나는 얼마 전에 새로 구입해 볼이 비좁은 구두에 두 발을 구겨넣었다.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 엘리베이터가 꼭대기층에 머물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삼층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막 떠나려는 지하철에 올랐을 때에야 나는 어두운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머리를 매만지고, 넥타이를 매고, 셔츠의 구겨진 부분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아내의 소름끼치게 담담한 얼굴, 굳은 목소리가 떠오른 것은 그다음이었다.

꿈을 꿨어,라고 아내는 두 번 말했다. 달리는 차창 너머, 터널의 어둠 위로 그녀의 얼굴이 스쳐갔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 얼굴은 낯설었다. 그러나 거래처 사람에게 둘러댈 변명과 오늘 소개할 시안을 삼십분 안에 정리해내야 했으므로, 더이상 아내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든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겠어, 부서 바뀌고 몇달 동안 하루도 열두시 전에 퇴근한 적이 없었잖아,라고 잠깐 속으로 뇌까렸을 뿐이었다.

*

어두운 숲이었어. 아무도 없었어. 뾰죽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어. 분명 일행과 함께였던 것 같은데, 혼자 길을 잃었나봐. 무서웠어. 추웠어. 얼어붙은 계곡을 하나 건너서, 헛간 같은 밝은 건물을 발견했어.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간 순간 봤어. 수백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는 걸.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내리고 있었어. 끝없이 고깃덩어리들을 헤치고 나아갔지만 반대쪽 출구는 나타나지 않았어. 입고 있던 흰옷이 온통 피에 젖었어.

어떻게 거길 빠져나왔는지 몰라. 계곡을 거슬러 달리고 또 달렸어. 갑자기 숲이 환해지고, 봄날의 나무들이 초록빛으로 우거졌어. 어린아이들이 우글거리고, 맛있는 냄새가 났어. 수많은 가족들이 소풍중이었어. 그 광경은, 말할 수 없이 찬란했어. 시냇물이 소리내서 흐르고, 그 곁으로 돗자리를 깔고 앉은 사람들, 김밥을 먹는 사람들. 한편에선 고기를 굽고, 노랫소리, 즐거운 웃음소리가 쟁쟁했어.

하지만 난 무서웠어. 아직 내 옷에 피가 묻어 있었어. 아무도 날 보지 못한 사이 나무 뒤에 웅크려 숨었어.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었어. 내 입에 피가 묻어 있었어.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먹었거든.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

아내가 차린 저녁식탁은 상춧잎과 된장, 쇠고기도 조갯살도 넣지 않은 말간 미역국, 김치가 전부였다.

“뭐야. 그래서, 그 꿈나부랭이 때문에 고기를 다 버렸다는 거야? 도대체 얼마어치를?”

나는 식탁의자에서 일어나 냉동실 문을 열었다. 텅 비어 있었다. 미숫가루와 고춧가루, 얼린 풋고추, 다진 마늘 한봉지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계란프라이라도 해줘. 나 오늘 정말 피곤해.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어.”

“계란도 버렸어.”

“뭐?”

“우유도 끊었어.”

“기가 막히는군. 나까지 고기를 먹지 말라는 거야?”

“냉장고에 그것들을 놔둘 수 없어. 참을 수가 없어.”

도대체 저렇게 자기중심적일 수가. 나는 아내의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눈을 내리깔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차분해 보였다. 뜻밖이었다. 그녀에게 저토록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었다니. 저렇게 비이성적인 여자였다니.

“그래서, 앞으로 이 집에선 고기를 못 먹는다는 거야?”

“어차피 당신은 주로 아침만 먹잖아. 점심, 저녁에 고기를 자주 먹을 텐데…… 아침 한끼 고기를 안 먹는다고 죽진 않아.”

아내는 마치 자신의 선택이 이성적이고 타당한 것이라는 듯 차근차근 답했다.

“좋다, 나는 그렇다 치고 당신은? 당신은 이제부터 고기를 안 먹겠다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제까지?”

“……언제까지나.”

말문이 막혔다. 요즘 채식 열풍이 분다는 것쯤은 나도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 알고 있었다. 건강하게 오래 살 생각으로, 알레르기니 아토피니 하는 체질을 바꾸려고, 혹은 환경을 보호하려고 사람들은 채식주의자가 된다. 물론, 절에 들어간 스님들이야 살생을 않겠다는 대의가 있겠지만, 사춘기소녀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인가. 살을 빼겠다는 것도 아니고, 병을 고치려는 것도 아니고, 무슨 귀신에 씐 것도 아니고, 악몽 한번 꾸고는 식습관을 바꾸다니. 남편의 만류 따위는 고려조차 하지 않는 저 고집스러움이라니.

처음부터 아내가 고기를 역겨워하는 체질이었다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결혼 전부터 아내는 식성이 좋았고, 그 점이 특히 내 마음에 들었었다. 그녀는 불판에 얹힌 갈비를 익숙한 솜씨로 뒤집었고, 한손에 집게를, 다른 한손에 큰 가위를 들고 쓱쓱 잘라내는 품이 듬직했다. 결혼한 뒤 일요일에 만들어내는 요리들도 그럴듯했다. 다진 생강과 물엿으로 미리 재워 향긋하고 달콤하게 튀긴 삼겹살. 샤브샤브용 쇠고기를 후추와 죽염, 참기름으로 간하고 찹쌀가루를 앞뒤로 입힌 뒤 구워 마치 떡이나 전 같던 그녀만의 특별식. 다진 쇠고기와 불린 쌀을 참기름에 볶은 뒤 콩나물을 얹어 지은 콩나물비빔밥. 굵은 감자를 썰어넣은 닭도리탕은 어땠던가. 자작자작 매콤한 국물이 속살까지 배어든 그것을 나는 한자리에서 세 접시씩 비워내곤 했다.

그런데 이제 아내가 차려놓은 식탁은 무슨 꼴인가. 비스듬히 의자에 앉은 아내는 한눈에도 맛없어 보이는 미역국을 입에 떠넣고 있었다. 밥과 된장을 상추에 싸서 볼이 불룩하게 넣고 씹었다.

나는 모르고 있었다. 저 여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안 먹어?”

아이를 넷쯤 낳아 기른 중년의 여자처럼 방심한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내가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삭아삭 소리를 내어 오랫동안 김칫대를 씹었다.

*

봄이 올 때까지 아내는 변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풀만 먹게 되긴 했지만 나는 더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철두철미하게 변하면 다른 한 사람은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는 하루하루 말라갔다. 그러잖아도 튀어나온 광대뼈가 볼썽사납게 뾰죽해졌다. 화장하지 않으면 피부가 병자처럼 핼쑥했다. 육식을 끊는다고 모두 아내처럼 살이 빠진다면 누구든 체중감량에 애를 끓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었다. 아내가 여위는 건 채식 때문이 아니었다. 꿈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상 그녀는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아내는 결코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늦은밤에 귀가하면 아내는 먼저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데 이제 그녀는 내가 자정 넘겨 들어와 씻고 잠자리에 든 뒤에도 안방으로 자러 들어오지 않았다.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채팅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밤새 케이블티브이를 보는 것도 아니었다. 말풍선에 대사를 쳐넣는 작업이 그렇게 많을 리도 없었다.

그녀는 새벽 다섯시쯤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고, 한시간쯤 자는 둥 마는 둥하고는 짧은 신음을 뱉으며 깨어나곤 했다. 헝클어진 머리에 까칠한 얼굴, 빨갛게 금이 간 눈으로 그녀는 내 아침식탁을 지키고 있었다. 자신은 한 숟가락도 뜨지 않은 채였다.

더욱 신경쓰이는 것은 그녀가 더이상 나와 섹스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늘 군말없이 내 몸의 요구에 응하는 편이었고, 때로는 먼저 내 몸을 더듬어올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손이 어깨에 닿기만 해도 조용히 몸을 피했다. 언젠가 나는 이유를 물었다.

“뭐가 문제야?”

“피곤해.”

“그러니 고기를 먹으라고. 고기를 안 먹으니 힘이 없지. 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

“사실은.”

“뭐?”

“……냄새가 나서 그래.”

“냄새?”

“고기냄새. 당신 몸에서 고기냄새가 나.”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못 봤어? 나 샤워했어. 어디서 냄새가 난다는 거야?”

그녀의 대답은 진지했다.

“……땀구멍 하나하나에서.”

나는 가끔 불길한 생각을 했다. 혹시 이것이 초기증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말로만 듣던 편집증이나 망상, 신경쇠약 따위로 이어질 시초라면.

그러나 그녀가 어떤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여느 때처럼 그녀는 말수가 적었고 집 안을 잘 정돈했다. 주말이면 나물 두어 가지를 무쳤고, 고기 대신 버섯을 넣어 잡채를 만들기도 했다. 채식이 유행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다만 그녀가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 유난히 얼굴이 멍하고 무엇인가에 짓눌린 것처럼 보이는 아침에 내가 까닭을 물으면 “꿈을 꿨어”라고 대답한다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어떤 꿈이냐고 나는 묻지 않았다. 다시 어두운 숲속의 헛간, 피웅덩이에 비친 얼굴에 대한 얘기 따위를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들어가보지 못한, 알 길 없는, 알고 싶지 않은 꿈과 고통 속에서 그녀는 계속 야위어갔다. 무용수처럼 비쩍 마르는가 싶더니 종내에는 환자처럼 앙상한 뼈대만 남았다. 좋지 않은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소도시에서 목재소와 구멍가게를 하는 장인장모, 사람 좋은 처형과 처남 부부를 보더라도 정신적 일탈의 혈통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녀의 집안사람들을 떠올리면, 자욱한 연기와 마늘 타는 냄새가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소주잔이 오가며 고깃기름이 타들어가는 동안 여자들은 부엌에서 소란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든 식구가–––장인이 특히–––육회를 즐겼고, 장모는 손수 활어회를 뜰 줄 알았으며, 처형과 아내는 커다랗고 네모진 정육점용 칼을 휘둘러 닭 한마리를 잘게 토막낼 줄 아는 여자들이었다. 바퀴벌레 몇마리쯤 손바닥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아내의 생활력을 나는 좋아했다. 그녀는 내가 고르고 고른,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던가.

설령 그녀의 상태가 진심으로 의심스러웠다 해도, 흔히 말하는 상담이나 치료 따위를 고려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것들도 하나의 질환일 뿐이지, 흠이 아니야’라고 얘기하고 다녔다 한들 어디까지나 남의 일에 한해서였다. 정말이지, 나에게는 이상한 일들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었다.

*

그 꿈을 꾸기 전날 아침 난 얼어붙은 고기를 썰고 있었지. 당신이 화를 내며 재촉했어.

제기랄, 그렇게 꾸물대고 있을 거야?

알지, 당신이 서두를 때면 나는 정신을 못 차리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허둥대고, 그래서 오히려 일들이 뒤엉키지. 빨리, 더 빨리. 칼을 쥔 손이 바빠서 목덜미가 뜨거워졌어. 갑자기 도마가 앞으로 밀렸어. 손가락을 벤 것, 식칼의 이가 나간 건 그 찰나야.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리자 붉은 핏방울 하나가 빠르게 피어나고 있었어. 둥글게, 더 둥글게. 손가락을 입속에 넣자 마음이 편안해졌어. 선홍빛의 색깔과 함께, 이상하게도 그 들큼한 맛이 나를 진정시키는 것 같았어.

두번째로 집은 불고기를 우물거리다가 당신은 입에 든 걸 뱉어냈지. 반짝이는 걸 골라 들고 고함을 질렀지.

뭐야, 이건! 칼조각 아냐!

일그러진 얼굴로 날뛰는 당신을 나는 우두커니 바라보았어.

그냥 삼켰으면 어쩔 뻔했어! 죽을 뻔했잖아!

왜 나는 그때 놀라지 않았을까. 오히려 더욱 침착해졌어. 마치 서늘한 손이 내 이마를 짚어준 것 같았어. 문득 썰물처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미끄러지듯 밀려나갔어. 식탁이, 당신이, 부엌의 모든 가구들이. 나와, 내가 앉은 의자만 무한한 공간 속에 남은 것 같았어.

다음날 새벽이었어. 헛간 속의 피웅덩이, 거기 비친 얼굴을 처음 본 건.

*

“입술이 그게 뭐야. 화장을 안한 거야?”

나는 구두를 벗었다. 검은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우두망찰 서 있는 아내의 팔을 끌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나설 참이야, 지금?”

나와 아내의 모습이 화장대 거울 속에 비쳤다.

“다시 해, 화장.”

아내는 조용히 내 손을 뿌리쳤다. 콤팩트를 열고 퍼프를 얼굴에 두드렸다. 뿌옇게 분이 떠, 그녀의 얼굴은 먼지를 뒤집어쓴 헝겊인형 같아졌다. 늘 바르던 짙은 산호색 루주를 잿빛 입술에 바르자 아쉬운 대로 아내의 얼굴은 환자 같은 창백함을 벗었다. 나는 안도했다.

“늦었어. 서둘러.”

나는 앞장서서 현관문을 열었다. 한손으로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른 채, 아내가 뭉그적뭉그적 남색 운동화에 발을 끼우는 모습을 초조히 지켜보았다. 트렌치코트에 운동화라니,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구두가 없었다. 모든 종류의 가죽제품을 버렸기 때문이다.

시동을 걸어놓은 차에 먼저 올라타자마자 교통방송을 틀었다. 사장이 예약해놓은 시내 한정식집 주변의 교통상황을 체크하기 위해 귀를 기울이며, 안전벨트를 매고 사이드브레이크를 내렸다. 아내는 잠깐 사이 코트에 묻혀온 찬기운을 펄럭이며 옆자리에 앉고는 부스럭부스럭 안전벨트를 맸다.

“오늘 잘해야 돼. 사장이 부부동반 모임에 과장급을 부른 건 내가 처음이야. 그만큼 날 잘 보고 있다는 거야.”

샛길을 이용해 최대한 서두른 덕분에 빠듯하게 약속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눈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널따란 주차장이 딸린 이층집이었다.

늦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얇은 봄코트 차림으로 주차장 한켠에 서서 저녁바람을 맞고 있는 아내는 추워 보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줄곧 아내는 말이 없었지만, 워낙 그런 사람이었으므로 나는 개의하지 않았다. 말이 없으면 좋다, 어른들은 원래 저런 여자를 좋아한다고, 나는 조금 불편했던 마음을 손쉽게 떨쳐버렸다.

사장 내외와 상무, 전무 내외가 미리 와 있었다. 부장 내외는 바로 우리를 뒤따라 들어왔다. 목례와 웃음으로 인사를 나눈 뒤 아내와 나는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눈썹을 가늘게 뽑고 커다란 비취목걸이를 한 사장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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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ditional information

제본

반양장본

페이지

247쪽

지은이

한강

출판사

창비

출간일

2007-10-30

원제

영문판 The Vegeta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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